생각의 숲

공공기관의 혁신 (中) : 혁신적인 서비스와 안정적인 서비스

잠자는보노보노 2023. 11. 4.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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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에서 부르짖는 혁신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두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저번 글에 이어서 "왜 혁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죠.

 

우선, 저번 글에서 기관장이 혁신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혁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굳이 부정적인 늬앙스를 풍기지 않더라도, 명확한 비전없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을겁니다.

불명확한 미션을 가진 조직원들은 제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혁신을 일으킨 끝에 자기파괴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 제가 지난 직장생활 동안 봐왔던 "공공기관의 혁신"이었습니다.

때문에 기관장은 기관을 혁신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는 혁신이 무엇인지, 어떤 부분에서 혁신을 일으킬 것인지를 명확히한 상태에서 혁신을 시작해야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그렇다면, 기관장이 혁신의 정의를 천명하고 모든 조직원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 다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고위임원회의(또는 주월간회의)에서 기관장이 일장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우리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는 너무 길고 무겁다. 또 직원들이 불필요한 회의와 보고자료 작성에 매여서 정작 해야할 업무를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의와 보고자료 작성을 최소화하고 팀장이 주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자!"

혹은,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서류와 프로세스가 너무 많다. 불필요한 서류를 과감히 없애고 검토기간을 단축해서 국민의 편익을 도모하자!"

아마 공공기관에 근무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런 류의 오더를 경험하신 적이 몇 번 있을 겁니다.

그 다음에 기획부서의 주도로 회의 및 보고자료 축소에 대한 협조문이 날라왔을 것이고요.(그 협조문 안에 1~2페이지의 기관 혁신 계획(안)이 첨부되어 있었을 겁니다.)

 

"혁신의 정의와 목표가 설정되었으니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질까요?"

 

이제 모든 부서에 회의는 주 1회로 제한한다는 협조문이 배포됩니다. 또 위임전결 규정이 개정되어 팀장이 결정할 수 있는 업무가 대폭 확대되었습니다.

회의실에 불이 켜져있거나 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보면 지나가는 부서장이 한 마디씩 건낼겁니다.

"아니, 팀장이 정해서 업무배분하면 되지 왜 또 직원들 시간을 뺏고 있어? 그러라고 전결권 줬잖아?"

 

팀장은 더 이상 회의를 소집하지 않습니다.

팀장은 막강한 전결권을 휘둘러 그 간 생각해왔던 혁신들을 하나 둘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아, 물론 모든 업무는 사전에 구두로 본부장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보고서와 결재문서에는 본부장이 지시한 내용이 토씨 하나 빠짐없이 들어가 있지만 결재문서 그 어디에도 본부장의 서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야 팀장이 전결권자니까요.

 

팀원들은 서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황을 공유할만한 자리가 없을 뿐더러, 굳이 점심시간에 일 얘기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구구절절 설명해봐야 잘해보라는 응원만 돌아올 뿐입니다.

어차피 팀장이 전결권자니 팀장하고만 얘기해도 충분할 터 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면 아마도 새로운 오더가 떨어질겁니다.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보고하라"

 

안타깝게도 이것이 그간 경험해왔던 공공기관의 혁신 프로세스입니다.

물론 모든 기관이 그런것은 아닐겁니다. 명확한 목표 아래 조직원들이 일치단결해서 나아가는 조직이 분명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는 중앙부처 산하에만 300개가 넘는 공공기관이 있고, 지자체 산하까지 모두 합하면 약 890여개의 공공기관이 있습니다. 걔 중에 분명 혁신을 이룩하는 모범적인 기관이 있겠죠.

그러나 과연 그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무엇보다 혁신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기업이 혁신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장에는 지속적으로 경쟁자가 유입되고 있고, 자사의 제품/서비스는 계속해서 진부해져 갑니다.

소비자에게 새롭고 강렬한 경험을 시켜주지 못한다면 당장 내일의 생존을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은 어떤가요?

공공기관의 설립목적은 국민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그게 물류나 수도사업이든 정부지원사업이든 결론적으로 국민에게 편익을 제공하는 것이 기관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대게 이런 공공서비스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서비스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당장 정부지원사업의 사업계획서 양식이 매년, 매분기마다 바뀐다면 기업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서류 한 두개를 없애는 거야 좋다지만 어차피 기업이 작성하고 준비해야할 서류는 고만고만합니다.

그보다 작년 양식을 보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왔는데, 하루아침에 양식이 바뀐다거나 사업공고가 나지 않는 일이 더 치명적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기관의 지역본부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서류제출이 가능했는데, 올해부터는 인터넷으로만 접수가 가능하다고 안내받으면 시간내서 거기까지 찾아간 기업 대표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덤으로, 공공기관은 혁신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론 통폐합이 되거나 위세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잘 있는 기관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리는 것은 정부나 부처의 입장에서도 만만한 작업은 아닐겁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없어진 사례도 있긴 합니다....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요.)

그렇다면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대체 뭐가  아쉬워서 혁신을 해야할까요? 기관장님들은 대체 뭐가 그리 좋아지길래 혁신을 부르짖는 걸까요?

 

"어쨌든 혁신하면 뭐든 좋아질거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혁신을 정의하고 혁신해야할 목표를 정했다면, 그 다음은 왜 그것을 혁신해야하는지 당위성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기 마련이고, 혁신 또한 좋아지는 부분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그늘이 지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왜 공공기관은 혁신해야만 할까요?

 

더욱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그 중에는 기관의 혁신을 반기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조직 외부에도 있지만 조직 내부에도 있을 겁니다. 아주 많이요.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기관장님에게 물어보고 싶을 겁니다.(사실 저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왜 굳이 안정적으로 잘돌아가는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가?", "혁신하지 않으면 기관은 존속하기 힘든 것인가?", "혁신하면 뭐가 좋아지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혁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혁신하기만 하면 뭐든 좋아질거라는건 환상에 불과합니다.

혁신이 무엇인지, 무엇을 혁신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왜 혁신해야하는지 기관장님들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혁신은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한 것입니다.

 

다음 글 "어떻게 혁신해야하는가"에서는 조직내부의 저항세력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 저항세력은 혁신이 실패하는데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왜 생기는지,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의견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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