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일기장

사업계획서(제안서) 작성의 딜레마 : 용역과 사업의 경계

잠자는보노보노 2024. 2. 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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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을 한지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최근에는 평온한 중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평온함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내리쬐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겉모습을 말하며,

정신없음은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아 온갖 사업과 용역을 뒤지는 손가락과 머리를 의미함입니다.

 

처음 이직을 하면서 각오했던 바와 다르게 나날이 게을러져가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현재 맡고 있는 업무는 매 기수 정해진 프로그램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일이다보니 그다지 의욕도 나지 않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기 시작했습니다.

애당초 민간의 역동성을 쫓아 이직한 마당에 하는 일은 원래 기관에서 했던 것들과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을의 위치로 내려옴으로써 상당한 제약이 가해진 상황이었죠.

그렇게 점점 나태해지는 제 모습을 보고있자니 머릿속에 경종이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연말에는 상사와 갈등을 감수해가며 회사에 억지를 부렸습니다.

프로답지 못하다는 자각은 있지만, 현재를 감수하며 침전해가기에는 제 에고가 너무 강했던 탓이겠지요.

어쨌든 대표님께서 다소 무리한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주신 덕분에 '신사업 기획'이라는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물론 급조된 업무인지라 구체적인 R&R은 잡혀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게다가 구두로는 허락이 떨어졌지만 당장 몸을 빼기에는 상황에 여의치않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지만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신사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부 구성원들 간에 의견합치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정확히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한 것 같습니다.

바로 "신사업 기획이 의미하는 바가 새로운 액셀러레이팅 용역(사업)을 수주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액셀러레이터(AC)도 벤처투자회사(VC)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투자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AC가 VC와 다른점은 투자와 함께 단기간의 육성을 거친다는 점입니다.

초기 기업에 투자와 함께 4~6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교육과 멘토링을 제공하고, 기간이 종료할 즈음에 데모데이라 불리는 투자제안 발표(IR) 행사를 하는 형태를 의미합니다.

최근에는 VC심사역들도 투자한 기업을 관리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있고, 심지어 VC와 AC를 겸하는 하우스들도 많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차별점은 정형화된 프로그램을 제공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되는 것 같네요.

문제는 이런 정형화된 프로그램에는 돈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이요.

 

멘토링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많거나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분들을 모셔야하고, 이런 분들을 모시기 위해서는 적지않은 비용이 소요됩니다. 물론 후배 창업가들을 위해 재능을 기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공짜로 알려주는 사람은 흔치 않죠.

강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의 내용이 귀에 쏙쏙 박히는 1타 강사를 모시려면 적지않은 금액을 지급해야만 합니다.

이런 비용들을 영세한 AC들이 자기 자본으로 감당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한번 투자하면 짧게는 3년, 길게는 7~10년이 지나야 유의미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투자업의 특성상 당장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게 현실입니다.

때문에 대다수의 AC들은 이런 비용을 정부에서 하는 액셀러레이팅 사업(용역)에 기대어 해결하고 있습니다.

정부(기관)는 목적에 맞게 예산을 집행하고 수행사(AC)는 그 돈을 받아 인건비와 기업 육성비용을 충당하는 형태로요.

정부 역시 중소기업을 키우기 위해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다 보니 이런 수요와 공급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지점에 시장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물론 성공적으로 투자금을 회수하고 그 이윤으로 재투자를 하는 곳들도 제법 많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액셀러레이터라고 해도 결국 본질은 투자회사입니다. 다만 아직은 가치가 낮은 기업을 소액으로 사온 다음 직접 키워서 가치를 뻥튀기 시킨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단순하게 제조업에 비교해보면 저렴한 원재료를 사와서 가공해 되파는, 이른바 싸게 사서 비싸게 되파는 수익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객은 우리가 키운 기업을 비싸게(그들의 입장에서는 적정가에) 사가는 투자사와 어느정도 성장한 대/중견기업들이 되겠군요.

그런데 가공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다보니 이를 용역으로 떼우는 형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혼란스러운 점은 제가 읽은 글과 사례에서 당장의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 용역에 집중하다가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사라져버린 비운의 기업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경영의 대가들이 용역에 파묻히지 말고 고객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합니다.

그러한 금언에 비춰볼 때 제가 해야할 일은 고객을 발굴하고 팔아야할 기업을 세일즈하는 것일텐데,

정작 제가 받은 미션과 KPI는 영업이익 확보를 위해 용역을 수주하라는 내용이군요.

그것도 상당히 도전적인 금액이 목표로 잡혔습니다.

 

현실적으로 인건비를 확보해야 함은 맞습니다. 회사가 영속하려면 결국엔 수입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대체 어느 선까지 타협해야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고객을 발굴하고 기업을 세일즈'하는 것이 제 역할이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일개 직원은 그런 장대한 업무보다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일이나 잘하는게 미덕이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용역을 멀리하고 투자한 포토폴리오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활동에 집중해야할지,

적극적으로 사업(용역)을 수주해서 당장의 영업이익을 확보해야할지 고민이 깊어집니다.

이상적으로는 사업(용역)을 수주해서 그걸 통해 우리의 포토폴리오사 가치를 높이면 된다지만,

현실적으로 액셀러레이팅 대상 기업은 기관에서 선발하는 사례가 많고, 우리의 포토폴리오사를 모두 다 집어넣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포토폴리오사도 제각각 성장단계와 수요가 다르니까요)

거기다 사업을 수주/수행하는데도 자원이 들어가다보니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원을 투입하고, 그 자원을 회수/유지하기 위해 다시 또 사업을 수주해야하는, 그런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투정을 부려 새로운 업무를 받게된 마당에 이것 마저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대는 것은 프로가 할 짓이 아니기에 우선은 회사의 니즈에 맞춰보려 합니다.

게다가 제안서를 쓰는 것은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걸 제 핵심 업무로 삼아야 할지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네요.

제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지도 살펴봐야 하겠고요.

 

여러므로 고민이 되는 나날입니다. 항상 현실은 지식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네요.

고민의 끝에 길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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