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하고, 블로그를 시작하다
거창하게 독립선언문을 던졌지만 정작 뭐부터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니, 독립선언을 했지만 결심을 한 시점으로부터 1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1년간 나름대로 준비를 하긴했지만 이게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건지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1년간 했던 나름의 준비는 또 다른 썰로 풀어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잘다니던 직장에서 퇴사한거겠죠.
시작부터 너무 큰 폭탄을 던진것 같지만, 어쨌든 잘 다니던 직장에서 호기롭게 사표를 냈습니다.
물론 아무 대책없이 나온건 아니고, 다른 직장을 구해서 나온거긴 합니다.
원래 다니던 회사는 중소규모 공공기관으로 직원이 약 200명 정도됩니다.
이름을 말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어디? 정도의 반응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공기관은 공공기관입니다.
(이름이 꽤 길어서 풀네임을 얘기해주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월급과 근속년수에 따라 승진코스가 정해져있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습니다.
이직하는 회사는 10명 규모의 자그마한 민간 회사입니다. 투자와 컨설팅을 병행하는 회사지요.
상식적으로 둘 사이에는 까마득한 격차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간의 인식을 봐도, 현실을 직시해도 어쨌든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한 선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스스로 얘기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나름 촉망받는 직원이었던 모양입니다.
퇴사 사실을 알렸을때 상사들의 첫 반응은 충격과 거부였습니다.
직속 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허공을 바라보다가 약 5분만에 재고의 여지가 없냐는 첫마디를 꺼냈습니다.
부서장은 "못들은 걸로 할테니 주말이 지나고(퇴사를 선언한건 목요일이었습니다) 다시 얘기하자" 는 반응이었습니다.
주변 동료들에게 퇴사사실을 알리자 업무공백을 대체 누가 메울수 있겠냐는 걱정과, 가만히 있어도 보장되는 출세코스를 왜 스스로 못버려서 안달이냐는 의아함이 터져나왔습니다. 심지어 원하는 부서에 꽂아줄테니 퇴사하지 말라는 회유도 있었습니다.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아, 부모님께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다면 격한 반대가 터져나왔을테고 사후에 말씀드린다면 아마도 뒷목을 잡고 넘어가시겠지요. 앞으로도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결정을 너그럽게,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게 받아준 와이프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어쨌든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지 일주일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업무를 맡으면 온종일 그것만 생각하는 이상한 성격인지라, 몰입에 대한 대가로 그동안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퇴사하던 주에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그동안의 건강악화가 한번에 몰려와 목소리 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주말에는 아예 앓아누워서 이틀 내내 이불속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 월요일 아침이 되고 출근을 안해도 되니 그런 병들이 씻은듯 싹 사라졌습니다. 목소리도 정상적으로 나오고 온몸에 힘이 넘쳐나더군요. 이래서 퇴사는 암도 고친다고 하나 봅니다.
독립은 독립인데 그냥 돈주는 물주가 바뀌었을 뿐이라는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서,
여유로운 아침을 만끽하며 일주일 동안 대체 뭘 해야하나 고민을 해봤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괜찮은 직장이 곧 제 명함이었습니다.
'정부 지원금을 퍼주는 공공기관의 실무자. 그것도 담당 팀장이 꽤나 신뢰하는 듯 보이는' 이 마법의 단어는 제 능력이나 인품에 관계없이 어지간한 기업의 대표님, 이사님들과 맞먹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정부 지원금을 받아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괜히 실무자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고, 중요 행사때마다 참석해달라는 전화가 몇통씩 걸려오기도 했습니다.(행사가 끝나고 선물 추첨식에는 '우연찮게' 제가 그 모든 선물들을 적어도 한종류씩은 챙기게 됐고요)
지금보다 어릴때는 그것이 곧 저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을만큼 먹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조카뻘인 제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맞는지 틀린지도 모를 제 말에 가끔씩 맞장구도 쳐줘야하는 입장은 얼마나 난처했을까요.
공공기관의 울타리를 벗어난 저는 이제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저그런 사람 n호입니다. 하대가 당연하고 어느 기업 대표님은 커녕 팀장님께도 말 한마디 붙이기 너무나도 어려운 그런 입장이 됐습니다. 그 누구도 저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을테니 이제는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고 매 순간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고 싶지 않아서 독립을 결심했는데 역설적으로 그 모든 사람에게 매 순간 저를 증명해야만 하는군요.
나의 사상, 생각, 고뇌 그 모든 것을 입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그래서 그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누군가 나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그 사람을 붙잡고 2박3일을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 링크 하나를 쿨하게 남기는게 더 멋있지 않겠어요?사실 블로그를 만들자는 것은 독립을 결심하면서 생각했던 일인데도, 그동안 계속 미뤄오다가 이제야 숙제 하나를 마칩니다. 물론 이 숙제는 평생을 안고가야할 숙제겠군요.
앞으로는 이 블로그에 제 철학과 진심, 고뇌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때로는 가볍게 잡담도 하고요.
나중에 아들이 꽤나 컸을때 이 블로그를 들이밀고 감상문을 써오라고 할 생각입니다.(고민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겠지요)
이 글을 읽은 누군가와 수많은 고민을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홀로 서있다는 불안감을 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