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일기장

노잼도시의 비밀 : 출제자의 속마음

잠자는보노보노 2024. 7. 2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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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노잼도시 밈은 몇년 전부터 유명했습니다. 이른바 대전에는 성심당 말고는 볼 것이 없다는 얘기죠.

이제는 전설이 된 지인이 대전에 온다 알고리즘

대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반박하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대전에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성심당을 얘기하고 그 뒤부터는 할 말이 궁해지는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이 주제로 심지어 논문도 나오고 책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봤습니다.

밈으로 굳어진 "대전 노잼도시"에 반박하는 기사였습니다.

통계를 들이밀고 대전의 가 볼만한 관광지를 하나 하나 소개하면서 왜 대전이 노잼도시가 아닌지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글이었습니다.

나름 권위있는 기관의 박사님과 도시재생쪽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 대전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신 대표님이 인터뷰를 하시며 왜 대전이 노잼이 아닌지를 친절하게 알려주시더군요.

기사의 내용 자체는 유익했습니다. 정보 전달의 측면에서도, 팩트를 짚어주는 측면에서도, 대전 지역민 입장에서 도시를 홍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를 보면서 저는 좀 찝찝했습니다. 기사를 본 지 며칠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사의 내용이 아른거리고 제 안의 반동 기질이 꿈틀거리더군요.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라도 토해내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겠더군요.

인터넷의 파급력을 알고 제가 감히 그 분들의 의견에 반박할 만한 권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라도 적어두고 싶었습니다.

대전을 유잼도시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수많은 유관기관 분들이 계신것을 알고 있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걸 왜 당신들이 반박하나요?"

 

대전에 노잼도시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10~20대 청년들입니다.

철저히 청년들의 시각에서 대전은 콘텐츠가 부족한 노잼 도시가 맞습니다. 저 역시 몇년 전만 해도 이 대전이라는 도시가 그렇게 재미없을 수가 없었습니다.(지금은 대전만한 도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분명 대전은 노잼도시가 맞습니다. 저는 재미있는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소중한 고향이 그렇게 폄훼되는 것이 속상할 수도 있습니다.

노잼도시 이미지를 타파하고 싶어하는 심정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답을 애먼 4050에서 찾는지는 도저히 모르겠군요.

 

저는 기사에서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박사님이 나오셔서 관사촌과 두부두루치기를 언급하며 서울과 비교하지말고 지역 고유의 문화를 찾아보자고 말씀하시는 모습에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습니다.

한때 인터넷에 떠돌던 우스갯소리가 생각납니다.

히치콕 감독의 손녀가 할아버지(히치콕)의 작품에 대한 레포트를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고

할아버지에게 물어가며 레포트를 작성했더니 F학점을 받았다는 그 썰이요.

청년들이 대전이 재미없다고 하는 이유가 설마 관광지가 없고 먹을게 없어서겠습니까?

그런 이유라면 대전보다 낙후된 지역은 왜 노잼도시가 아닐까요?

서울과 비교해서 노잼도시가 아닌 곳이 없을텐데 왜 유독 대전만 노잼도시일까요?

노잼도시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거기에 대한 답을 출제자한테 안물어보고 통계청과 박사님들께 물어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진솔하게 얘기해보면 생계와 학문에 매진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대전이 노잼도시라는 명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냥 솔직히 얘기해서 관사촌을 둘러보는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 자체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배우신 분들의 조크인건지?

 

서울에는 ~리단길이 굉장히 많습니다.

녹사평 근처의 경리단길이 예쁜 카페들로 유명세를 타면서 툭하면 ~리단길을 갖다 붙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정작 경리단길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망했지만요)

그런데 관과 높으신 분들 주도로 ~리단길 어쩌고 네이밍을 하면서 홍보한 거리 치고 경리단길 만큼 성공한 케이스는 못본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잠깐 반짝했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곳들이 있을 뿐이지요.

개인적으로 짐작컨데 경리단길의 명성은 그저 예쁜 카페들이 많아서 생긴 건 아닐겁니다.

카페는 그저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줬을 뿐입니다.

예쁜 카페가 있다기에 모였을 뿐이고 거기서 재미를 만들어낸 건 친구들과의 수다와 추억,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즉 콘텐츠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생태계는 인위적으로 만들기 불가능에 가까울 뿐더러, 관광지 몇 개로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관광지 몇 개 분의 역할을 성심당이 혼자 해내고 있습니다!)

 

대전이 노잼인 이유에 대해 굳이 반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또한 애정이고 재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반박해야겠다면 이번에는 흰머리가 보이는 고학력 박사님 대신 노는 걸 좋아하는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첨언하자면, 대전의 캐치프라이즈는 과학수도, 일류 경제도시보다 빵의 도시가 더 먹힐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전시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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