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일기장

그렇게 나는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잠자는보노보노 2023. 6. 14.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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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대략 1년 전입니다.

막 더워지기 시작하는 2022년 초여름 인근, 머리를 깎고 집에 돌아오는길

지난 30여년간의 삶을 관조하고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했습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그저 햇살이 너무 화창해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햇빛을 쬐는 어르신들의 표정이 너무 평화로워서

그런데 정작 나는 목표를 잃어버린채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에는 곰같은 와이프와 토끼같은 자식이 기다리고 있고

적당히 그럴싸한 직장과 한몸 의탁할 집까지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너무 이른 시기에 그것들을 이루고 나니 정작 그 이후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알 수 없어졌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이뤄냈을까?

여기서 뭘 더 해야할까?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 시덥잖은 고민거리들을 머리속에 담은채 햇빛이 내리쬐는 아파트 단지를 한가로이 걷고 있었습니다.

은퇴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고(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만큼 더 직장생활을 해야할겁니다),

아마도 이 글을 보는 선배들과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새파랗게 어린놈의 건방진 고민거리였겠지요.

하지만 태생부터 걱정거리를 달고 사는 체질인지라 그런 고민들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을 돌이켜 보자면, 나는 언제나 변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예쁜 보고서를 만들고 열변을 토해내어 상사를 설득하고.

하지만 언제나 결정의 나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극도로 단순화하면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리고

그들이 결정내릴 수 있도록 자료를 준비하고,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인 후 그것들을 예쁘게 포장할 따름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의 의견은 아무런 영향도 없고 영향을 끼쳐서도 안되는 불순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머리위에 있는 사람들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자신들보다 위에 있는 상사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가장 리스크가 적은 선택지를 고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미래가 그런 결말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끝에서 마침내

"나는 앞으로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남을 위한 보고서, 남을 위한 요점정리, 남을 위한 의사결정

이런것들을 배제하고

오롯이 나와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고,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는 오만하다고 비웃겠지만 젊음의 치기란 때론 그런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글은 저만의 독립선언문입니다.

비록 비루해질지라도, 끝에 가서는 역시 월급쟁이의 안락한 삶이 나았다고 후회할지언정

남은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해 투자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앞으로의 인생은 가시밭길에 폭풍이 몰아치는 길이겠지요.

그래도 포장도로를 달리다 끝에 가서는 마침내 멈추어서는 길보다는

끝없이 달리다 마침내 고꾸라지는 그런 삶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요?

 

간간히 비루한 근황을 전하겠습니다.

이 글을 보는 많은 이들의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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